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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천년부터 시작한 장고한 섬유의 물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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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일섬유 작성일15-01-28 09:56 조회2,7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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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05_04.gif'나의 아내가 짠 세초가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좋으리라 하고 비단을 주었다.
그 비단을 임금님이 사용하는 창고에 두고 국보로 삼았다.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임금이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의 이 기록은 신라시대 비단의 품질이 우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삼국 유사 「연오랑 세오녀」편에 전해진다. 대구가 섬유도시로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일제시대, 6.25사변 전후라는 견해가 많으나 사실 그 훨씬 이전부터 대구섬유의 발달

토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기원전 2천년경 동진에서 초피직물, 마직물이 생산됐고 삼한시대부터 견직물을 생산하면서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직물과 견직물 중심의 섬유산업이 본궤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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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05_05.gif'정천익의 집에 호증 홍원 이란 사람이 들러 목화를 보고 고국의 산물을 다시 보게될 줄은 몰랐다며 매우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때 홍원을 머물게하면서 그에게 베짜는 기술과 기구 제조하는 방법을 배웠던 정천익은 가족에게 기술을 가르쳐줘 마침내 베 한 필을 짰다. 그후 10년이 못 돼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됐다.' (「한국인물전집 문익점 편」)
중국의 목화씨가 유입돼 우리나라 최초로 면직물이 생산됐던 곳이 경북 의성이다.
문익점의 처가인 의성에서 장인인 정천익에 의해 재배되던 목화는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그 이름을 딴 물레를 만들어 실을 뽑았고 문래의 동생 문영은 베틀을 만들어 베를 생산,자신의 이름을 따 무명으로 전하게 했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과 내륙지방의 풍부한 노동력, 풍부한 용수 등은 오늘날 섬유도시 대구를 이루게한 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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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05_06.gif수공업 위주의 대구 섬유공업은 1905년 공장제 섬유공업시대를 맞이했다.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서 수직기 족답기 1대로 베를 짜던 추인호씨가 대구시 인교동에 족답기 20대로 동양염직소를 설립했는데 당시의 기록이 「대구시사」에 나와 있으나 공장설립 연대가 1917년이라고 돼 있어 추씨는 1970년 4월1일자 대구 매일신문에서 1915년이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추씨의 동양염직소는 후일 일제가 세운 조선방직보다 2년 앞서 설립된 최초의 방직공장으로서 한국 섬유공업이 대구에서 시작됐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추씨의 공장이 달성동으로 옮겨지면서 달성동과 비산동 일대 공장설립이 활기를 띄게 됐고 1920년대 달성공원 부근에는 20여개의 직물공장이 생겨나 당시 달성동 일대의 베틀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공장에서는 1917년부터 여공 채용을 시작했으며 동양모시의 거래가 활발해지자 포목상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조선조 3대 시장의 하나였던 서문시장뿐 아니라 동문시장과 멀리 서울,부산 나아가서는 북간도, 서간도에까지 포목상인들의 활동이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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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구섬유업은 1918년에서 1920년 사이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다주,가다포과, 조선제사 등 제사공장의 설립으로 명주시대의 도래를 맞이하게 됐다.
일본은 옛부터 양잠업이 성행했던 경북 성주, 군위, 예천지역의 풍부한 원료를 이용해 제사공장을 세웠고 양질의 생사를 일본으로 들여갔다. 그리고 중하급품은 시중에 흘러 나왔는데 동양염직소가 생사를 족답기에 넣어 명주를 생산해 냄으로써 대구 섬유업계에 전환점이 마련 됐다. 대구 명주의 명성이 보부상에 의해 전국 각지에 전해지자 타공장들도 생산제품을 명주로 전환했을 뿐 아니라 돈많은 지주들도 공장을 설립, 1943년까지 약 1천7백10대의 직기가 설치돼 호황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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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기,족답기,역직기등 보잘 것 없는 시설이었지만 착실한 성장을 해오던 대구섬유업계는 1942년 일제의 기업합병정책으로 수난기에 접어 들었다.
기업합병정책은 명목상 고급제품을 만들기 위해 기업의 규모를 확대시킨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목적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조달이었다.
1943년 제1차 기업합병때 직기 30대를 한 단위로 기업을 합병시켰는데 대개 직기 5대를 갖추고 있던 우리 기업들은 자본이 풍부한 일본인들에게 공장을 넘겨줘야 했다.

그리하여 70여개에 이르던 공장들 중 10개의 일본인 섬유공장과 19개의 한국인 공장만이 남게 됐다. 살아남은 19명의 대구 섬유인들은 일제의 2차 기업합병에 대항했다.
대구경북견직물조합측이 전하는 그때의 상황에 따르면 대구를 방문한 조선총독부 식산국장이 대구 섬유인들에게 대구 직물업이 조선 전체 직물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섬유업체의 정비가 시급하다며 기업합병을 설득했으나 설득에 실패한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했고 고 최익성 전 대구경북견직물조합 초대이사장은 고등계 순사에게 끌려가 실신할 정도로 매를 맞고 창문으로 달아나 다락에 숨어서 해방을 맞기도 했다.
이때의 기업합병으로 달성동 비산동 일대 직물공장이 전멸하고 침산동에 위치한 군소 직물공장들이 살아남아 후일 침산동 섬유단지를 형성하게 된다.

 

자료출처 " 한국섬유개발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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